<아래 글은 문화일보 2016년 3월 2일자 정호균동문에 대한 인터뷰기사입니다. > ------------------------------------------------------------------------------------------
< His Story >무대→연구소→공장→강단… “연극 스토리 같은 내 인생”
지난 2월 23일 경기 수원시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제2종합연구동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연구실에서 정호균 교수가 요즘 연구하고 있는 롤투롤(Roll to Roll) 생산 방식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정 교수는 “이 방식이 상용화되면 신문 찍듯 연속 공정의 OLED 제작이 가능해 기존 방식 대비 비용을 30% 절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업적보다 사연 위주로 저에 관한 인터뷰를 하고 싶으시다고요? 좋아요, 좋아. 제 인생이 스토리인데요.” 우리나라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산업의 개척자이자 ‘대부’인 정호균 성균관대 성균나노과학기술원 교수에 대한 첫 느낌은 ‘의외성’이었다. 지난 2월 23일 경기 수원시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제2종합연구동 개인 연구실에서 만난 정 교수는 인터뷰 내내 ‘의외’, ‘이례적’, ‘전환점’, ‘시야’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 기술고문 출신으로 강단에 선 정 교수는 지난 2002년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기술상, 2006년 대한민국 과학기술훈장 웅비장, 2010년 OLED 리더십 어워드 등 경력 사항만 보면 연구실에서 기술 개발에만 매진해온 전형적인 ‘공돌이’에 가까워 보였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모습은 인문학자 못지않았다. 학창 시절 연극배우로 활동했다는 그는 실험 장비로 시끄러운 연구실에서도 또렷한 발성을 뽐냈다. 외형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인생에 이 의외성은 하나의 동력처럼 여겨졌다. 연구소와 공장, 학계의 장벽을 수시로 뛰어넘었고 개발 업종을 바꾸는 의외의 모험에도 두려움 없이 맞섰던 게 지금의 정 교수를 만들었다. 이쯤 되면 산업계의 새 먹거리 찾기가 화두가 된 지금 그를 만난 의미가 비교적 명확해진다. 이미 OLED라는 신성장 동력을 찾은 경험이 있는 정 교수는 아니나 다를까, 지난 1월 수상자로 선정된 ‘칼 페르디난드 브라운 상’ 이야기를 꺼냈더니 “올해 드디어 디스플레이 업계에서 발상의 ‘전환’이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말부터 했다. 칼 페르디난드 브라운 상은 정보디스플레이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1987년 TV 브라운관을 개발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브라운 박사를 기념해 제정된 이 상은 세계정보디스플레이학회(SID)가 매년 정보디스플레이 분야 기술 개발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을 선발해 수여한다. 이 상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그는 OLED 기술 개발과 상업화에 기여한 공로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사실 OLED는 2000년대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왜 하필 지금 시점에 제가 상을 받느냐면요, 전 세계 업계가 ‘OLED가 대세’라는 걸 공식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에요. 개인에게 주는 큰 상이지만 사실 OLED 업계 전체에 주는 상인 거죠.” 액정표시장치(LCD) 시대의 종언이 이 상의 상징적 의미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는 2018년 아이폰8 디스플레이부터 OLED를 채택하기로 한 애플의 최근 결정이 기폭제가 됐다. 정 교수는 “가격 경쟁력만 확보되면 OLED가 소형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LCD를 대체하는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이야 OLED를 두고 대세라고 하지만 정 교수가 처음 이 분야에 뛰어들 때만 해도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개념이었다. 그전까지 삼성전자에서 반도체를 만든 정 교수에게는 더욱 그랬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UIUC(University of Illinois, Urbana-Champaign, Illinois)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삼성전자에 입사한 정 교수는 광(光)전자에 관심이 많긴 했지만 엄연한 반도체 전문가였다. “디스플레이 쪽에는 문외한에 가까웠어요. 1988년 삼성전자 반도체 메모리사업부 기술 담당으로 12년간 일하면서 센터장, 상무까지 달고 나름대로 전문가 소리를 듣던 때였거든요. 그 대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탈진해있었다는 게 문제였죠. 1999년 8월 안식년을 받고 미국에서 재충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다음 해 1월부터 삼성SDI로 출근하라는 회사 지시가 떨어지더군요.” 두려움을 가늠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도전에도 그는 OLED를 처음 접한 순간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디스플레이 기술’이라는 확신이 들었단다. 제품의 특성, 색깔, 응답속도 등에 먼저 반했고 두 개의 유리 기판 등 많은 부품이 들어가는 LCD와 비교했을 때 플라스틱 기판 하나만 들어가면 되는 OLED에서 혁신성을 느꼈다. 정 교수는 자신의 안목이 의외성에서 비롯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액정에 대한 전문적인 경험이 없어 OLED를 보고 더 깊게 빠져들 수 있었다”며 “기존 디스플레이 전문가였다면 그 기술 속도 때문에 액정에 집착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투명 디스플레이, 미러 디스플레이 등 OLED로 LCD보다 더 훌륭한 제품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은 넓은 시야가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회사가 기술적인 접점까지 고려했는지는 여전히 모를 일이지만 고진공, 트랜지스터 등 반도체 지식 등이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됐다는 게 정 교수의 회상이다. 이후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의욕적으로 OLED 개발에 나섰다. 고해상도, 대형화를 위해선 수동형 유기발광다이오드(PMOLED)보다 박막 트랜지스터(TFT·Thin Film Transistor)를 활용한 AMOLED가 더 장래성이 있다고 구체적인 방향 설정까지 이끌어낸 뒤 AMOLED 연구소 소장으로 25명의 팀원을 이끌었다. “1년 만에 첫 번째 샘플을 만들었고 2001년 2월엔 8.4인치 AMOLED를 개발했어요. 산요의 5.1인치가 호평을 받을 때였으니 우리가 얼마나 고무됐겠습니까.” 생각보다 빠른 성과였지만 며칠 뒤 소니가 13.1인치 개발 소식을 발표하면서 김이 확 빠졌다. 결국 같은 해 5월 미국에서 열린 디스플레이 학회에서 8.4인치를 공개하고 한국이 OLED 불모지가 아니라는 점을 세계 업계에 각인시키는 데 만족해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세계 최대 크기 AMOLED를 만들겠다는 꿈을 확고히 다졌다. ‘반도체, LCD도 해냈는데 이거라고 못하겠느냐’라는 자신감과 오기 사이의 감정이었다. 정 교수는 “PMOLED 생산 라인이 15인치까지는 가능하다기에 단순하게 보면 AMOLED도 그 정도 크기의 생산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봤다”며 “이 단순한 계산에 연구원들도 자발적으로 동참해 양말을 상자째 사놓고 몇 달간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고 떠올렸다. 기독교 신자인 그는 2001년 9월 드디어 15인치 AMOLED를 개발하고 신이 도왔다는 표현을 썼다. 당시 김순택 삼성SDI 사장은 바로 이 결과물을 들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날아가 출장 중이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 보고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가 봐도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정 교수는 이 공로로 전무 자리에 올랐고 1년에 한 번 수여하는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기술상을 받았다. “그때 제 감격과 흥분이 어땠냐면 말이죠, 아직도 시상식이 열리던 이건희 회장 생신(2002년 1월 9일)을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어요. 처음으로 받았던 큰 상이기도 했고요. 그 뒤에 대통령 은탑산업훈장도 받았는데 삼성인상 때 감격을 못 따라가더군요.” 15인치 AMOLED 개발은 우리나라 OLED 산업에서 하나의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정 교수는 “그전에는 ‘그렇게 어려운 기술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심이 일부에서 있었다”며 “그제야 ‘OLED가 된다’는 인식이 회사 전체적으로 퍼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2004년 연구 인력의 3분의 2인 200여 명으로 사업화 팀이 따로 꾸려진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정 교수는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회사, 국가 산업적 측면에서 탁월한 길을 걸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브라운관 세계 점유율 1위를 달리던 삼성SDI는 LCD라는 평판디스플레이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OLED를 새로운 먹거리로 삼았다. 이미 소니, 산요, 도시바 등 일본 회사들은 OLED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는 “삼성이 음극선 브라운관(CRT) 시장에서 성적이 좋아 OLED 기술에 전력 투구할 수 있는 환경도 호재였지만 경영진의 결단이 없었으면 기술 역전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삼성은 OLED 원천기술을 갖고 있던 코닥 등 쟁쟁한 경쟁사들을 제치고 2007년 세계 최초로 OLED 양산에 들어간 뒤 2010년 갤럭시 시리즈부터 본격적인 OLED 시대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정 교수는 삼성SDI를 이끌던 김 사장 곁에서 기업가 정신의 생생한 목격자가 되기도 했다. 새로운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영 원칙 아래에서 배터리,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 등 새 사업을 추진한 그를 정 교수는 ‘OLED 업계의 천군만마’라고 표현했다. 기술자 출신이 아니라 총괄 기획 분야 출신이었기에 기술 자체의 성공 여부보다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었고, 새 먹거리가 보이면 일관된 확신과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줬다. 정 교수는 “김 사장이 만약 중간 지점쯤에서 ‘안 될 거야’라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졌으면 다 망했을 것”이라며 “지금 우리나라 산업계에는 김 사장처럼 넓은 시야를 가진 인물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시야를 강조하는 면에선 외골수를 지양하는 ‘노마드(유목민)’의 모습이 녹아 있었다. 반도체 전문가에서 OLED 개척자로 변신한 이력 외에도 그런 흔적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변성기가 찾아오기 전인 중학교 시절엔 백작 부인 역할로 무대에 서면서 연극배우를 꿈꿨고, 고등학교 때는 연설을 잘한다는 평가에 당연히 문과 쪽으로 진로를 잡기도 했다. 우수한 수학 성적 등 타고난 자질까진 숨길 수 없어 공대생이 되긴 했지만 이후에도 변신은 계속됐다. 삼성전자에 오기 전 미국 회사에서 적외선 탐지기 등에 대한 연구 업무를 수행하다가 한국에 와서는 반도체 분야, 그것도 연구소가 아닌 공장 업무라는 이례적인 길을 선택했다. 연구만 7년 하다 보니 사업화, 상품화에 대한 갈망이 커져 몸이 견디질 못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 뒤 개발, 생산 현장에서는 강단에 대한 꿈을 품어와 2011년 교수가 됐다. 기업체에서는 하기 힘든 휘어지는(플렉시블) AMOLED의 다양한 기초 기술과 비용 절감 연구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는 그는 “목표 이후 또 옮아갈 목표를 세우려면 지금 목표 지점도 알아야 한다”며 “60% 정도쯤 (플렉시블 AMOLED 개발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후배(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도 잊지 않았다. ‘항상 넓게 보고 다양한 경험과 사고를 지녀야 한다’는 말을 거듭 강조했다. “이를테면 지금 유행하는 가상현실(VR)을 보고 새 먹거리라고 무작정 주장하기보다 그 이상의 혁신적 발상이 필요하단 거죠. 분야 간 융합과 이례적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스티브 잡스보다 더 위대한 혁신이 나올 수 있어요. 메가톤이 아닌 테라톤의 변화, 즉 스마트폰이 그러했듯 모두의 생활 패턴까지 바꿀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이 우리나라 전자업계에서 조만간 나왔으면 해요. 이보다 더 빈손에서도 잘 해왔는데 더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근평 기자 istandby4u@munhw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