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노신사
1.
가을 하늘 서편에 노을이 아름답게 빛나는 어스름 저녁 무렵에 한 소년이 코스모스가 만발한 천주교 사제司祭가 상주하지 않는
성당인 공소公所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평일이라 인적이 없는 공소 성전 출입문을 살며시 열고 맨 앞자리에 단정히 앉아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느님! 저를 보살펴 주시고 저의 기도를 들어 주세요.”
기도를 하는 동안 소년은 흐르는 눈물을 끊임없이 닦으며 뒤를 돌아보고 뒷자리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에는 엉엉 울며 큰소리로
외치면서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공소 근처에 있는 집에 누워있는 할머니 생각에 소년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노환으로 육신의 고통을 겪으며 손자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할머니와 다음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여동생 생각에 더욱 슬프게 눈물을 흘렸다.
소년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아빠는 2년 전에 돈 벌어 온다고 집을 나간 후 여태 소식이 없다. 엄마는 시내 공장에 새벽에 나가
날이 어둑해져야 집에 돌아왔다. 그 때문에 소년은 방과 후에 학교 근처 마트에서 다섯 시간 가량 잔심부름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귀가해서도 휘뚜루 마뚜루할 수가 없었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내년에는 중학교 진학해야 하는데 무슨 돈으로 중학교에 가느냐?”
엄마의 한숨 섞인 탄식 소리를 들었다. 소년은 불쌍한 할머니와 고생하는 엄마와 천진난만한 어린 여동생 생각으로 항상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한참을 울며 외치며 기도 중이었다. 누군가 소년의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애야, 간절히 기도하는 너의 바람이 무엇이냐?"
소년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공소 성전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점잖고 품위가 넘치는 멋진 노신사 한 분이 서 있었다. 순간
잠시 당황했지만, 다정스러운 할아버지 물음에 똑똑한 소년은 힘없이 대답했다.
“아빠는 안 계시고, 엄마 혼자 돈 벌어 네 식구가 겨우겨우 사는데, 내년에 중학교 갈 돈이 없어서, 중학교에 꼭 가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빌고 있는데요, 간절히 빌면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신다고 신부님께서 가르쳐 주셨어요.”
“아! 그러니? 그런데 네 생각과 행실과 말이 이를 데 없이 기특하고 착하고 똑똑하구나. 내 보기에 넌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구나.
아주 어여쁘다. 그래, 그런 네게 할아버지가 해 줄 것이 하나 생겼구나. 그걸 내가 해 주어야겠구나. 네가 중학교부터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 학교에 내는 돈은 모두 다 내가 내주겠다. 대신에 씩씩하고 힘차게 살고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웃을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 그런데 할아버지는 어디에 사시는 누구세요?”
“나는 서울 사는데, 공소 성모 동산에 활짝 핀 들국화와 마당 한 편에 만발한 코스모스가 너무 예뻐서 차 타고 지나가다가 잠시
들렀단다.”
“아! 그러셨군요.”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치며 노신사께 허리를 굽혀 정중히 절을 했다.
“그렇게 해 주시면 하느님께서 제 기도를 모두 다 들어주시는 것인데요. 하느님 만세!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씩씩하고 힘차게 살고,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웃을 돕는 사람이 꼭 되겠습니다.”
소년과 노신사는 어느덧 초저녁 어둠이 내려앉은 공소 마당 벤치에 함께 앉아 선선한 가을 날씨 속 뒷산 숲속에서 풍겨오는 향긋한
숲 내음과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오랫동안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곤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 위해 노신사의 차를 타고
면사무소 소재지 장터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2.
소년은 노신사의 도움으로 다음 해에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해 소년은 초등학교 전교 어린이 회장이었다. 겨울철 날씨로
유달리 바람이 세고 매섭게 차가운 그날도 등굣길에 항상 가는 집을 향했다.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다리를 저는
동급생 친구의 집이었다. 그 집에서 친구를 대동하고 학교로 향했다. 평소처럼 가방을 두 개 메고 친구를 부축하고 학교로 향했다.
소년과 친구는 학교에서 제일 공부를 잘했다. 둘은 단짝 친구였다. 학교 선생님도 재주 많고 공부를 잘하는 두 소년을 예뻐했다.
어려운 환경에도 쾌활한 아이들이 대견해서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날이 몹시 추운데 어서들 와라. 오늘 교장 선생님이 너희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단다. 어느 분이 내년에 중학교에 진학하는
너희 두 사람의 학비를 내주신단다.”
그 말을 듣고 소년은 깜짝 놀랐다.
“아, 저는 서울 할아버지가 다 내주실건데요.” “처음 듣는데, 서울에 할아버지가 계시냐?”
“네. 지난 가을에 천주교 공소에서 처음으로 만났어요.”
“하하! 잘 됐구나.”
“그럼, 저 대신 다른 친구 것을 그분이 내주시겠지요?”
“그래 그래야겠구나. 교장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는구나. 우리 고장을 위해 좋은 일을 하시는 아주 고마운 분이시다.”
소년은 친구와 함께 너무 기뻐 감사하다는 말을 소리높이 외쳤다.
“와! 신난다. 우리도 씩씩하고 힘차게 살고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들이 되어 이웃을 돕는 사람들이 꼭 되자꾸나.”
그 후 며칠이 지난 후 일과가 끝날 무렵이었다. 선생님이 소년과 친구와 또 다른 친구를 따로 불러 교장실에 함께 가자고 말하였다.
그들은 선생님을 따라 교장실에 갔다. 손님이 와 계신 듯했다. 그런데 아니, 그분은 공소에서 만난 그 노신사 할아버지가 아닌가.
그분은 의자에 앉아 교장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소년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아! 할아버지 여기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
“하하하! 네가 보고 싶어 왔단다.”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도 놀란 표정이었다.
선생님이 소년에게 물었다.
"너는 이분을 어떻게 아느냐?”
“지난 가을에 천주교 공소에서 처음 만난 할아버지예요.”
얼마 전 서울에 사는 분으로부터 교장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었다고 한다. 그 학교에 경제적으로 어려워 도움이 필요한 6학년 학생
두 명을 추천해주면 중학교 학비 전액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전화였다.
“아하! 할아버지셨구나. 우리 친구들 중학교 학비까지... 우리 세 친구, 씩씩하고 힘차게 살고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들이
되어 이웃을 돕는 사람들이 꼭 되자.”
똑똑하고 착하고 성실한 소년은 두 친구를 바라보고 또 한 번 굳게 다짐을 했다.
세 친구가 교장실을 막 나서는데 마침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시나브로 교정과 온 세상이 하얀색 눈으로
뒤덮였다. 세 친구는 교실로 돌아가 가방을 챙겨 다시 교장실로 갔다.
벅찬 기쁨으로 가득찬 세 친구는 기다리고 있는 노신사 할아버지와 교장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어느덧 그친 함박눈이 하얗게
덮인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걸어서, 학교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3.
소년과 두 친구는 노신사의 도움으로 시내에 있는 명문 중학교에 진학했다. 소년은 초등학교 시절 방과 후 마트에서 네다섯 시간 동안
심부름하던 일을 중학교 진학과 동시에 그만두었다. 면사무소까지 들어오는 시내버스를 타고 세 친구는 중학교에 다녔다. 그들은 셋이
같은 반이었다.
어느덧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모두 공부를 열심히 하여 반에서 일등을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투었다. 소년의 권유로 두 친구도
영세를 받았다. 그리고 주일날엔 천주교 공소에 가서 모두 함께 미사 참례를 했다. 소년은 미사 참례 시 신부님을 도와 예식을 보조하는
봉사자인 복사를 했다. 공소의 신자 수는 대략 100여 명 가량 되었다. 미사가 끝나면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모두 함께 식사를 했다.
이때가 소년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엄마도 여동생도 그런 것 같았다. 그러나 집에 누워있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엄마는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열심히 했다. 소년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엄마와 함께 큰소리로 외며 기도했다.
'엄마는 기도하시며 무엇을 바라시는 걸까?’
소년은 궁금했다. ‘아빠가 빨리 돌아오시라고 기도하시는 걸까?’ 엄마에게 넌지시 물었다.
“엄마는 기도하시며 뭘 간구懇求하시는 건가요? 아빠 빨리 돌아오시라고 비나요?”
그러자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 그것도 빌지만, 우리 식구들을 위해 기도하지.”
그래서 그런지 얼마 전에 그토록 기다리던 아빠의 소식이 왔다. 강원도 고성에서 어선을 타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다고 했다. 아빠는
집 떠난 지 거의 4년 가까이 되었지만, 수입이 적었다. 그나마 조금씩 모았던 돈도 사기를 당해 몽땅 날리고, 돈도 많이 못 벌어서
가족들에게 면목이 없어 연락도 못했다고 했다. 그 무렵, 어느덧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여동생도 ‘주님의 기도’를 잘 외웠다.
할머니는 항상 묵주를 손에 쥐고 계셨다.
창밖에는 어느덧 봄을 알리는 산수유꽃이 피더니, 매화꽃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다. 소년은 집 뒷산을 혼자 자주 오르곤 했다.
오솔길을 걸으며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민들레꽃, 목련꽃, 개나리꽃, 진달래꽃, 배꽃, 복숭아꽃, 살구꽃, 라일락꽃, 영산홍, 철쭉 등
봄꽃들이 지천이었다. 뒷산에는 6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산소가 늘 소년을 반겼다. 그곳에 갈 때마다 소년은 정중히 엎드려 절했다.
면사무소에서는 소년에게 가을부터 할 일을 주고 얼마간의 수고료를 주었다. 일요일이면 면에 사는 독거노인들에게 면사무소에서 주는
도시락을 리어커로 배달하는 일을 했다. 오랫동안 병환 중인 소년의 할머니도 포함되었다.
“할머니! 도시락 드세요.”
“우리 예쁜 손자가 이제 다 컸구나, 고맙다.”
도시락을 배달한 지도 벌써 6개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면장과 면사무소 직원들이 착하고 성실하며 똑똑한 소년을 귀여워하고 예뻐하며
대견해 했다.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다리를 저는 단짝인 소년의 친구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며 정부에서 주는 연금으로 가까스로 경제생활을 해결해 나갔다.
어느 날 단짝 친구가 방과 후에 집 문을 들어섰다. 그런데 집 문 안쪽 바닥에 봉투가 떨어져 있었다. 봉투에는 단짝 친구 이름이 적혀있었고
돈다발이 들어있었다. 생활에 보태쓰라는 문구도 적혀있었다. 세어보니 50만 원이나 되는 큰 액수의 돈이었다. 어디서 불어왔는지 따사로운
봄바람이 꽃향기를 동반하여 단짝 친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보냈는지 고맙기 그지없었다.
면장이 소년에게 줄 정부 장학금을 소년 모르게 알아보고 있었다. 정부 장학금 50만 원을 확보하여 받아서 소년에게 주었다.
“면장님! 감사합니다. 씩씩하고 힘차게 살고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웃을 돕는 사람이 꼭 되겠습니다.”
항상 소년은 노신사 할아버지와 한 약속을 잊지 않았다. 소년은 이 돈을 자신을 밝히지 않고, 남모르게 단짝 친구에게 준 것이었다.
단짝 친구도 영리하고 똑똑했다. 봉투에 적혀있는 글씨를 보니 낯이 익었다. 자세히 보니 소년의 글씨에 틀림이 없었다. 소년이 정부 장학금
50만 원을 받은 걸 알고 있는 단짝 친구였다.
“아하! 이 친구가 나를 위해 선행을 했구나.”
다음날 소년을 만난 단짝 친구는 덥석 소년의 손을 잡았다.
“고맙다 친구야! 이렇게 귀한 큰돈을 내게 주고...”
“어떻게 알았어?”
“네 글씨 보고 알았지.”
“아하! 역시 너는 똑돌이야. 하하!”
“네가 항상 말한 대로 우리 씩씩하고 힘차게 살고 공부 열심히 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 남을 돕는 사람이 꼭 되자.”
동쪽의 일출이 아름다운 하늘 아래 온갖 꽃들이 만발한 따사로운 봄날 아침에 마냥 행복한 마음으로 두 소년은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중학교를 향했다.
4.
종달새가 봄 하늘에 넘놀더니, 차츰 산천이 초록빛으로 바뀌며, 앞 평야 논에서는 벌써 뜸북새의 뜸북 소리가 들려왔다. 뒷산 숲속에서도
뻐꾹새의 뻐꾹 소리가 조용한 전원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늦봄의 5월 말 날씨는 맑고 푸른 하늘과 조각구름이 마냥 평화로웠다. 게다가
밝은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농부들은 모내기 준비로 한창 바쁜 때가 온 것이다.
강원도 고성에서 어선을 타고 고기를 잡는다는 아빠가 돈 500만 원을 보내와서 3년 가까이 병석에서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시내 종합병원에서
검사를 받게 되었다. 뇌질환, 간질환, 허리질환 등 여러 군데가 아파서 입원도 하고 치료도 받았다. 500만 원을 거의 다 쓴 셈이었다. 그런데
허리는 수술을 받아야 해서 또 수술비 500만 원 가량이 더 필요했다. 엄마가 시내 공장에서 받는 월급은 할머니 약값과 집 월세를 포함하여
생활비로 다 빠져나갔다. 그래서 할머니의 수술비가 없어 수술을 못 받는 상태였다. 그래도 소년은 다리를 저는 단짝 친구보다는 그나마 자기
처지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항상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아갔다.
신록의 푸르름이 싱그럽고 햇볕이 따사로운 어느 날 오후였다. 서울 사는 노신사 할아버지가 학교를 찾아왔다. 소년과 두 친구에게 선물을
한 보따리씩 안겨주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래 요즘 별일 없느냐?”
“아빠한테서 연락이 오고 돈도 500만 원 보내 주셨어요”
“아, 그래, 대단히 좋은 일이다. 할머니는 좀 어떠시냐?”
소년이 오랫동안 병환 중인 할머니를 항상 걱정하며 마음 아파하는 것을 잘 아는 노신사였다.
“할머니는 아빠가 보내주신 돈으로 치료받아 많이 좋아지셨어요”
“하하하! 아주 좋은 일이다.”
노신사는 소년과 두 친구를 승용차로 각자의 집에 데려다주고 마지막으로 소년의 집에 들렀다. 할머니를 보니 얼굴은 밝고 혈색이 좋아지긴
했지만, 허리질환으로 여전히 거동하기가 어려웠다.
“아직 할머니가 거동이 불편하신데 병원에서 뭐라고 하느냐?”
“허리 수술받으시면 좋아질 수 있다는데요. 아빠가 또 돈 보내주시면 수술 받으신대요”
“어느 병원에서 수술 받으실 거냐?”
“시내에 있는 파티마 성모병원이예요.”
“아, 그래, 그럼 나중에 또 보자. 씩씩하고 힘차게 살고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웃을 돕는 사람이 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것 항상 잊지 말기를 바란다.”
“네, 할아버지, 잘 알고 있고요. 또 그렇게 하고 있어요”
노신사는 소년과 그의 여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소년의 집을 떠난 승용차가 서울로 향했다.
그런 어느 날, 파티마 성모병원 원무과에서 소년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할머니 이름을 찾으며 수술과 입원 준비가 다 됐으니 언제 올
거냐고 물었다.
“아니, 아직 신청도 안 했는데요.”
“예? 모든 비용은 이미 지급됐는데 빨리 오세요.”
“아, 예?”
엄마는 그만 깜짝 놀랐다.
“누가 비용을 지급했어요?”
병원 원무과 직원은 지급인 이름을 알려주었다. 다름 아닌 노신사 어르신이 아닌가. 엄마는 자신의 아들 학비를 내주시는 분이 또 이렇게
배려를 해 주시니 숨이 막힐 정도로 고마웠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우리 자식들 잘 키워 어르신께 꼭 보답해야지. 하느님! 예수님! 감사합니다.”
엄마는 다음 날 아침에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 원무과를 찾았다. 원무과 직원이 그네에게 말했다.
“지급하신 분 성함과 전화번호입니다. 수술과 입원 총결산 후 부족분을 이분이 마저 지급하신답니다.”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르신 고맙습니다. 항상 말씀하신 대로 자식들 훌륭하게 키워 이웃을 돕는 사람들이 되도록 교육하겠습니다. 저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날따라 병원 원무과 창 너머로 보이는 잘 가꾸어진 빨간 장미꽃 하얀 장미꽃들이 엄마에게는 여느 날보다 유달리 더 예쁘고 아름답게 보였다.
할머니는 즉각 입원 후 수술을 받았다. 수술한 의사는 수술이 성공적으로 잘 됐고 3개월 후에는 정상적인 거동이 가능할 것이라 장담하듯 말했다.
할머니가 퇴원하는 날 토요일 정오 가까운 오전 시간에 소년과 그의 여동생은 엄마를 따라 병원으로 갔다. 퇴원한 할머니와 엄마와 소년과 여동생
네 식구는, 조금씩 풀려나가는 소년의 가정과 미래에 대한 벅찬 희망을 안고, 기쁨이 가득 찬 마음으로 5월의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여동생이
크게 좋아하는 짬뽕을 사 먹기 위해 중국 식당으로 향했다.
5.
연두색 청포도와 고추의 푸른 열매가 익어가는 7월 초순이었다. 조용한 시골길의 잎새가 푸르고 무성한 가로수들이 생동하는 계절이 찾아왔다.
초록색을 지극히 좋아하는 소년에게는 조금 덥기는 하지만, 초여름 싱그러운 초록빛 세상이 참으로 좋아 보였다.
소년은 이제 어엿한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학교 공부를 잘해서 항상 3학년 전체 1등을 다투었다. 다리를 저는 단짝 친구도 공부를 잘해 소년과
1등을 겨뤘다. 두 소년은 막상막하였다. 그런데 단짝 친구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며 매우 궁핍했다. 그래도 할머니가 식당에서 알바도 하며 열심히
살았다. 고생 끝에 낙이 있다는 말을 굳게 믿고 있었다.
강원도 고성에서 어선을 타고 고기 잡는 아빠가 4년 만에 집에 왔다. 수입도 적은데 그동안 모았던 돈을 사기를 당해 몽땅 날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모은 돈 1,000만 원을 가지고 왔다. 별다른 건강에 이상이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었다. 아직 아빠는 영세를 받지 않아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다. 보름 동안 쉬고 또다시 강원도 고성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아빠는 술 담배를 너무 즐긴다. 소년과 가족들이
줄이라고 조언을 하였지만, 아빠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래도 소년은 끈질기게 졸라서 줄인다고 약속을 얻어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허리 수술을 받은 할머니는 조금씩 거동을 하였다. 공소 성당을 걸어서 가기에는 아직 무리여서 휠체어로 이동하여 할머니,
아빠, 엄마, 여동생과 함께 소년은 미사 참례를 하고 아빠를 신부님에게 소개시켜 드렸다.
여느 일요일과 다름없이 신자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소년에게는 제일 좋아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특별히 아빠가 함께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기쁨은 거듭된다고 했던가, 아빠가 시내 식당에 가서 불고기를 사와서 점심 식사를 가족들이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소년은 천주교 공소에만 가면 노신사 할아버지가 더욱 그립고 보고 싶었다. 그 날도 소년은 공소에서 노신사와 한 약속을 되새기며 중얼거렸다.
“씩씩하고 힘차게 살고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웃을 돕는 사람이 꼭 되겠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익히 간구하던 약속의 말이 절로 나왔다.
시내에 있는 중학교를 세 친구는 노신사 덕분으로 학비 걱정 없이 다니고 있었다. 일요일이면 함께 미사 참례를 했다. 시내버스 기사들도 세 친구를
만나면 늘 덕담을 주며 예뻐했다. 인사도 공손히 잘하고 예의가 바르기 때문이었다. 세 친구는 남다르게 공부도 잘하고 예의가 바른 소년들이었다.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을 포함한 모든 선생님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또한 동료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모두가 과외 활동으로 문예반원들이었다.
아름다운 글을 지어 세상을 밝게 하고 싶은 열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 친구는 이것도 이웃에 대한 봉사의 한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시간만 나면 학교 도서관에서 나란히 책들을 탐독했다.
6.
소년의 시선이 나락이 자라는 초록빛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노신사 할아버지를 만난 후 잘 풀려나가는 생활이 너무 좋고
신나서 감사기도를 했다. 두 손을 모아 하느님께 큰소리로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서울 할아버지! 사랑합니다. 보고 싶어요.”
생동하는 싱그러운 자연과 눈부신 햇살이 소년의 외침을 반겨주고 있었다. 높고 푸른 하늘에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말씀이 들리는 듯했다.
“올바른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꼭 이루어진다.”
< 박창현 단편소설 > 2023년 11월 11일


위 사진들은 소설의 배경 전남 순천시 별량면 천주교 공소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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