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산행기, 오병연 대변인 글 (8/8)

8월 2일

1년 여 준비하며 여러 우여 곡절 을 거친 뒤
44회 백두산 원정팀은
8월 02일 오전 10시 20분 인천 신공항에 모였다.

뜻을 같이 했던 여러 동문들이 이런 저런 사정으로
안타깝게도 중도 하차를 하였으며,
그 중 에서도 산행계획의 큰 틀을 잡아 왔던 김 영인,
그리고 Web 상에서 꾸준히 Back Up 을 해 왔던 Web-Master 김 성환
두 동문의 마지막 순간 탈락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날 모인 일행은 모두 30명으로 그 면면은 다음과 같다.
 

계훈남, 김건환, 김제구, 송영강, 오병연 ,윤기돈,  윤인중,
이희창, 정규철, 정기우, 정원해, 정학균, 채희선 , 한종훈,

김기흔 + 김매리 부부,  김세균 + 유덕희 부부, 배종화 + 박순희 부부,
원승환 + 배정희 부부,  이상호 + 이미형 부부, 정호균 + 김옥화 부부,
허동녕 + 이금재 부부,  홍인식 + 김경심 부부


오전 12시 20분 정시에 출발한 중국북방항공 ( CJ688) 은
1시간 50분 만에 長春에 도착하니 현지 시간 13시 10분 ( 우리와 시차 한시간) 이다.

그 옛날 교과서의  “ … 기차는 원의 중심을 달린다… “ 는
기행문을 연상 시키는 - 사방을 둘러 보아도 숲에 둘러 쌓인 지평선만 저 멀리 있을 뿐,
자그마한 언덕도 볼 수 없는  長春 은 예부터 만주족의 중심지로
일제 때는 관동군사령부가 있던 곳이니 우리민족과도 관계가 깊으나,
일정상 비행기 Transit 만 할 뿐 시내를 돌아 볼 수는 없었다.

長春 공항에서 2시간 남짓 기다린 끝에 local 비행기로 갈아 타고
드디어 延吉 ( 현지음 Yanji = 옌지) 에 도착하니 15:50.
아직까지는 그 악명 높은 중국 항공사들의 연 발착 도
44회 일행을 비켜 나는 듯 정시 운행 이었으나,
실은 마지막에 한 펀치 먹이기 위한 호흡 고르기 일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 가 ?

연길은 吉林省 延邊 自治區의 중심도시 이며 ,
延邊은 바로 옛날 우리가 間島 라고 부르던 곳이니
在中 200 만 僑胞 중 100 만 이상이 이 延邊 에 몰려 살고 있는,
朝鮮族 自治區 이며 지리적으로는 우리 함경북도 회령 북쪽 이다.

이런 사정을 반영하는 듯 공항 간판도
한글 “ 연길” 이 먼저 이고 한자가 다음으로 씌여 있으며
연변 일대의 간판은 이리 하도록 법으로 정해 있단다.
공항을 나오니 48회 코끼리 (=신동석) 군이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일행을 환영한다.
불과 몇 시간 전 한국을 떠났건만 낯 설은 땅에서 동문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 없다.

오후 4시 반 이나 비가 오는 탓인지 주위는 이미 어둡고
(중국은 북경 표준시를 그 광대한 땅에 단일 실시하여 그렇지,
실제 경도를 따지면 차라리 한국시간과 같아야 할 만주 에서
5시가 가까우면 실은 6시 이니 어두운 것이 당연한 것이다.)

연길서 백두산 밑 까지는 차로 5시간 거리
(도로 사정이 척도 일 뿐 지리적 거리는 큰 의미가 없다) 이나
비 오는 밤중임을 감안하면 6시간 정도는 잡아야 한단다.

도중에 마땅한 식당이 없는 관계로 연길 시내
중국식당-  新海利 食部 -에서 이른 저녁을 들게 되었다.
맛으로 세계를 휘어 잡은 중국음식점 중 이렇게 맛이 없는 식당이 있다는 것이 놀라왔으나,
이는 그 뒤 조선족 식당에서 먹을 이름하여 “한식” 에 비하면 차라리 진수성찬 이었다.

연변 방면 여행의 식사란
생존을 위하여 소화가 되고 영양가 있는 물체를 위장으로 삼켜 넣는 과정 일 뿐 이다.
대개 음식문화의 발전은 지역 물산의 풍부함에 비례하는 것인 데,
연변은 중국에서도 변방이요 그리 건너 간 우리 동포들도
일제의 수탈에 견디다 못해 남부여대 하여 간 이들이 대부분일 터이며
그 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저간의 경제사정으로 볼 때
어느 겨를에 인생을 즐기기 위한 음식을 발전시킬 수 있었겠는 가 ?

이번 여행의 목적이 민족의 영산 ? 백두 를 참관함이니 만큼,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인 맛난 음식 섭렵 부분은  참아야만 했다.
아무려나 필수 칼로리를 섭취하여야만 한다는 당위성 아래  구복을  채운 후
드디어 6시경 백두산으로 버스는 출발하였다.
이윽고 칠흑 같은 어둠이 닥치니 바깥을 짐작할 수 없었다.

한시간 남짓 달린 버스는 7시 반 경 휴게소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한국고속도로 휴게소 수준을 연변에서 기대한 것은 물론 아니나
천막 두어 개를 치고 조악한 기념품을 팔며 역시 천막으로 된 변소 한 동이 전부인 곳을
휴게소라 이름 지으니 중국인의 낯 두꺼운 명명술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남자들은 어둠을 이용하여 바깥에서 대충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으나
부인들은 어찌 해결 하였는 지 ??

버스는 계속 달려 드디어 백두산 밑 숙소 - 白山 大酒店- 에 도착하니 밤 11시 반경.
연길에서의 식사로 미루어 하숙 수준으로 짐작했던 숙소는
그 보다는 낳아  한국 지방 여관 정도는 되었다.
우리보다 하루 먼저 출발한 40회 선배 여러분들이 반갑게 맞이하여 주신다.

김제구 회장 / 김건환 총무가 서울서부터 주도 면밀히
Rooming List 를 짜온 탓에 일사천리로 Check-In 을 마치고
방에 들어 가니 대략 자정이 된 무렵이었다.
내일 산행을 앞두고 일행은 모두 일찍 잠을 청하였으나,
홀가분히 산행을 마친 40회 선배들의 가무음곡은 창 밖을 맴돌고 있었다.
아무렴 국민가수 시대에 백두산 밑에서 한 곡씩이야 하셔야 겠지요.
기다려 주시오.
44회 차례는 내일 입니다.

8월 3일

6시 Morning Call ( 전화가 아니라 각 방문을 두드리는 행위)
7 시 아침

이 사전 계획에 한 사람 의 차질도 없으니
모두 큰 산을 앞에 두고 내심 긴장들 한 탓이렸다.

아침은 의외로 괜찮았으니 ( 물론 그전 그리고 그 뒤에 닥칠 저녁에 비해서 라는 뜻임)
평소 아침으로는 위에 부담이 가는 향신료를 피하여 빵식을 주로 해온 대변인은
중국 빵 ( 거의 안흥 찐빵으로 생각하면 됨) 과 젤리,
삶은 달걀로 거의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Breakfast 를 해결할 수 있었다.

호정 여행사 권 선배의 조언대로 방방이 일 불씩 팁을 놓고 나서기
무섭게 바로 걷어 간다.
(통상으로는 방 청소하면서 자연스레 챙기는 것인 데…. )

8시 정각 예정대로 등산 입구를 향하여 버스는 출발하고
이어 들어 오는 풍경은 죽죽 곧은 하얀 자작나무에
드문 드문 난 삼나무 원시림 사이로 직선으로 난 길이었다.
한국의 산하와 다른 점은 우리는 산 밑에 이미 험준한 봉우리들이 겹겹히 있어
산에 들어 온 것을 짐작케  하나,
백두산은 산행로 입구 까지가 산 임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도 없이
평평한 삼림지대이니
지형이 대륙에서는 완만히 올라 와
한 반도 쪽으로 급경사를 이루었다는 사전 정보를 실감케 하였다.

등산로 입구 매표소 입구에서 얼마간 지체하는 동안
입장료를 물어 보니 중국 돈 80 위안 ( 런민폐 - RMB) 이란다.
근 13,000 원 이니 우리 로서도 작지 않지만
중국 변방에서 큰 돈이 아닐 수 없다.
사회주의 국가의 설익은 상술에 혀가 내 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일행은 두 팀으로 나누이니
本流는 원래 계획대로
소천지 - 악화림대- 용문봉- 천지호반- 역순 귀환으로
그 인원은 아래 방류를 제외한 23 명.

傍流는 40회 선배들의 조언 대로
천문봉 - 천지기상대 즉 꼭대기 까지 지프로 가고
천문봉에서 천지호반 까지 하산길이 새로이 개척 되어 있다 하여
그 길로 천지에서 본류와  합류 하기로 하였으니

원승환 + 배정희 부부, 배종화 + 박순희 부부, 홍인식 + 김경심 부부 그리고 허동녕 동기회장의 부인 이금재 씨
등 7 명이었다.
그러나 이 팀은 짙은 안개속에 천지로 내려 가는 길을 못 찾아
장백호반 쪽으로 하산 할 수 밖에 없었으니
나중에 듣는 사람들이 그저 안타까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9시반 부터 시작 된 본류의 산행은 입구에 있는 小天池 서부터 시작하니,
小天池 는 이름만 그럴싸 할 뿐 작은 연못에 불과 하다.

조별로 산행을 하기로 일껏 정하였으나 실력차가 있는 관계로 곧 Guide 김 군
( 조선족) 과  정 원해 군이 선두를 맡아 치고 나가게 되었다.

이 정군은 이해가 잘 안 되는 인물로
아침 7시 식사시간 반주부터 시작하여 밤 3시 자리에 들 때 까지 알코올 섭취가 이어지니,
근 20시간을 마시는 셈인 데

( 대변인이 힘들게 굳이 입을 통하여 마실게 아니라 주사로 인젝션 하면 어떠냐고 슬쩍 제안했으나 그건 야만이라서 싫단다 )
산행 맨 앞에서 요란하게 떠 들며 내내 선두를 맡았다.
그것도 신발 양말 다 벗고 맨발에 반바지 차림이니 신기하기 짝이 없다.
( 딴 사람은 고산에 비가 내리는 관계로 산행 내내 추위를 느꼈다)
요즈음 알코올 자동차 개발 한 다던데,
알코올 엔진 개발 참고 삼아 정군의 위장과 심장 관계를 연구해 봄 직도 하다.

등산 시작 20여 분 만에 침엽수림을 지나
나무와 초원이 뒤 섞인 지대를 만나니 마치 골프장 사이로 등산을 하는 듯 하며
그 풀 밭 밑에는 두꺼운 이끼가 깔려 있으니  어떤 양탄자 보다도 푹신하다.

이윽고 한시간 남짓에 나무 수풀은 사라지고
풀밭지대가 시작되니 그 경관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생각하면 된다.
좌우로 보이는 연봉은 나무 한 그루 안 보이는 가운 데
끊임없이 비바람에 조금 씩 깎여 무너져 내리는 듯 크고 작은 바위들이 굴러 내린 흔적이 보인다.

가늘게 내리던 비는 피할 수풀을 지나니 오히려 거세지고
모두 추위에 조금씩 지쳐 말 없이 걷는 가운데
비 옷도 안 입고 반바지에 맨발로 가는 정군만 혀가 꼬부라져 시끄럽다.

2시간 여를 지나 장백 폭포가 보이는 곳에서 기념촬영을 하니
이 지점에서 계훈남군이 뒤로 쳐지게 된다.
바로 옆에 눈과 얼음 더미가 있어 채희선 군이 만년설이라고 탄성을 지르나
만년인지 십년인지 어이 알며 우선 보기에 지저분하여 감탄할 기분은 아니었다.

곧 등성이를 오르니 이제 백두산 분화구 연봉이다.
이에 주위는 몇 십미터 앞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다.
여기 까지 와서 천지를 못 보게 되는 것이나 아닐 까 ?
백두산 온 사람 가운데 천지 본 사람 많지 않다더니 우리도 그리 되려나..

산행시작 3시간 정도에 용문봉 도착하여 천지로 내려 가는 길을 보니
가이드가 길이라니 그런 줄 알지,
도저히 엄두가 안 나는 급경사에 바위가 곧 우르르 흘러 내릴 듯한
( 실제로 하산하면서 조그만 바위들 건드리면 바로 구름) 너덜지대였다.
용문봉에서 대기하거나 바로 하산할 사람들을 골라 내려 하나,
모두들 추위에 떠느니 차라리 움직이겠단다.

내려 가면서 세차게 흐르는 급류를 보게 되니
바로 천지 물이 넘쳐 흐르는 “통천하 “ 또는 “ 승사하” 이다.
이리 넘쳐 흐르는 물길이 몇 군데 이냐고 물으니 단 하나 란다.
천지에 내린 빗방울이 동으로 가면 두만강이요 서로 가면 압록강- 황해란 말은 사실이 아닌 듯 하다.

조심 조심 마치 괭이 앞에 쥐처럼 살금살금 너덜지대를 통과한 일행은
통천하를 따라 걸어 달문 ( 천지물이 넘치는 곳) 을 지나 마침내 천지에 이르렀다.
위에서는 흔적도 보이지 않던 천지는 이제 우리 앞에 그 고요한 자태를 드러내니
맞은 편 대안은 비구름 안개에 가려 보이다 말다 하고 있다.

천지는 둘레 14.4 km, 최대너비 3550 m, 최대수심 384 m로
해발 2190 meter 에 위치하고 있으며,
차가운 호수의 기운이 안개와 구름에 살짝 덮여 있고,
다가간 사람들은 그 엄숙함에 압도 되어 절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으니
가히 仙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백두산 기와 백두대간 기를 앞세우고 기념촬영을 하고 바로 준비한 점심을 먹다.

다만 마음이 아픈 것은 이미 천지 둘레 곳곳에 깨진 유리병 조각이 널려 있으며
천지 내려 가는 길 과 용문봉 일대에 젓가락 , 비닐, 펫병등이 널려 있고
한국과 달리 쓰레기 줍는 노력도 보이지 않으니
찾는 이 많을수록 쓰레기는 더욱 더 늘어만  갈 것이니 이일을 어이 할 까 ?
찾는 이의 대부분이 우리 한국인이니 중국만 탓 할 수도 없었다.
깊이 반성할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금강산 관광 시 원성이 자자한
북한의 과도한 규제가 오히려 장래를 생각할 때는 옳은 조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점심 반주로 마신 소주, 매실주 에 자못 거나 해 지니,
용문봉으로 오르는 길은 힘에 버겁기만 하다.
한 걸음에 한 번씩 쉬어 가며 간신히 올라

 


이어 내쳐서  오던 길로 되돌아 하산하여
소천지 근처 세워 둔 버스로 돌아오니 오후 5시경이다.
점심시간 합쳐 약 7시간 반의 산행이었다.

천문봉 팀은 이미 돌아 와 온천까지 마쳤으나
다만 안개 싸인 산정에 서 있었을 뿐
천지와 주위 연봉의 위용을 볼 수는 없었다.
마음으로 보면 되지 꼭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야 !

온천 시설이 시원찮다는 정보에 본류는 바로 숙소로 돌아와
예정 대로 가무음곡, 카드로 밤 들이 노닐었다.

8월 4일

전날 이런 저런 놀이로 새벽 세시가 넘어 자리에 들은 일행은
놀랍게도 전원 6시 기상, 7시 반 출발의 시간표를 정확히 지킨다.

기념품으로 백두산 코스가 찍힌 손수건을 사니
출발이 임박한 탓으로 전날 한장 에 천원 (한화) 하던 것이
2장에 천원이란다.
일행에게 조금 더 네고 해도 될 듯 하다고 귀뜸 해 주니,
4장에 천원씩 사오고 끝내는 5장 천원에 산 이도 있다.

쭉 곧은 자작나무 숲 사이를 약 30분 달리니
바로 이도백하로 백두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다.
美人松 공원이 유명하단 말 만 듣고 보면서 그대로 통과.

9시 반 경 금강산 휴게소에 도착하여 꿀물을 마시는 중
이 휴게소 사장이 탈북자들을 잘 도와 주고
또 북한 관계 설명도 해 준다고 하여 줄 지어 기다려 설명장으로 들어 가니
처음에 몇 마디 하는 척 하더니 바로 약 장사 를 시작한다.
우황청심원을  원방대로 만드는 곳은 북한 밖에 없으니
즉 약재가 무공해요, 가장 중요한 사향노루가
딴 나라에서는 야생동물 보호 때문에 구할 수 없으나
북한은 괜찮다나 ??

글쎄.. 듣기로는 자본과 기술의 부족으로 공해방지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북쪽이 오히려 공해가 더 심하고,
사향노루는 세계적으로 거의 멸종 상태 라던데…

연길교외를 거쳐 용정에 이르니 12시가 넘었다.
점심을 마친 후 윤동주 시인의 모교인 대성중학 옛터를 찾으니
동창들의 정성으로 비교적 잘 되어 있었다.
해란강과 일송정은 버스에서 설명으로 만 듣고 지나갔다.

도문 가는 길에 곰 농장을 들렀다.
가이드 김 군은 여기서 물건을 사면 자기와 기사에게 얼마 떨어지는 것이 있다고 솔직히 털어 놓는다.
도착 전 곰 700 여 마리를 기르는 세계최대의 사육장이란 말을 반신 반의 하였으나
과연 연령- 생산 공정 (?) 별로 나누어진
10 여개의 우리에 각각 몇 십 마리씩 들어 있는 것이 아닌 가 ?
이름하여 곰 천국이나 눈에 뜨이는 것은 그야말로 곰의 생지옥이었다.

모든 곰의 귀에 꼬리표를 붙여 놓으니 개체관리를 하기 위함이란다.
곰으로서야 관리 안 해 주어도 좋으니 귀에 제발 꼬리표 따위 붙이지 말라고 하지 않을 까?

안내원은 말끝마다 곰을 연구 보호하는 기관의 규모로는 세계최대라고 하나,
보호한다면서 어찌 살아 있는 곰의 쓸개에 호스를 박아 그 즙을 빨아내는 가 ?
말로는 일주일에 한번 씩 그것도 1/4 씩 정도만 뽑기 때문에 곰에게는 아무 지장이 없다 하나,
그리 지장 없으면 자기 쓸개에 호스 박아 뽑아 보지.
우리에 딩구는 곰의 배쪽에 길게 난 흉터는
끔찍하게도 쓸개즙 채취 호스를 박기 위한 절개수술 자욱이다.

사육장 최종 코스에 있는 쓸개즙 채취장을 들러
마침 그날은 채취하지 않는 날이라  공정을 볼 수는 없으나
설비로 미루어 그 처참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에 갇혀 있던 곰을 작은 창살 틈새로 유도하여 꼼짝 달싹 못하게 해 놓고
수의사가 미리 박혀 있는 호스를 운용하며 뽑는 다는 것이다.
수의사는 일껏 배운 지식으로 겨우 한다는 짓이 이런 일인가 ?

곰의 쓸개가 아무리 좋다 한 들 그렇게 까지 하여 몸을 위해야 할 까 ?
중국정부의 국제협약을 공공연히 무시하는 처사에
그저 아연할 따름이며 이 글을 우연 히라도 읽으시는 분은
그런 제품을 사기 전 한번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랄 따름이다.

복잡한 생각을 뒤로하고 도문으로 향하였다.
도문은 바로 북한과 두만강을 두고 접해 있는 국경도시 이니 그 이름부터 심상치가 않다.

백두산 정계비에 東爲土門 - 동으로는 토문으로 국경을 정한다 하였으니,
토문 , 도문, 두만 모두 발음적으로 대단히 유사하다.

다다르니 과연 중랑천 보다도 그 폭이 좁은 듯한 하천이 바로 두만강이란다.
다리 중간까지 (약 오십보 정도  ? ) 가는 데는 우리 돈 5천원을 내야 한다.

하도 이리 저리 돈 내라는 데가 많아 일행은 카메라 셔터 한번 눌러 달라는 부탁에도
“ 야, 천원 내”  하는 농담을 하기에 이르렀다.

다리 중간이 바로 국경으로 북한과는 이제 겨우 약 몇십 미터 남짓이다.
망원경을 꺼내 보아도 사람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으니
그저 티브이 뉴스에서 본 것과 별 다름이 없다.
일행 누군가가 짐짓 북한 쪽으로 한 발자국 디미니
국가보안법상 잠입 탈출이 아닐까 ?

다시 연길로 돌아 와 6시부터 심양 가는 7시 비행기를 기다렸으나
기어코 북방항공이 심술을 부리기 시작하여
1시간 또 한 시간 씩 지연 되어 공항 바닥에서 마이티 를
( 카드게임으로 돈이 별로 왔다 갔다 하지 않는 건전한 놀이)
세시간 반 남짓한 후인 밤 9시 40분에야 겨우 탈 수 있었다.

다음날 8월 5일  심양-인천 간은 원래 오전 11시 로 되었으나
출국 전 느닷없이 새벽 5시 50분으로 변경 통보 받으니
계획된 심양관광 취소하는 것은 물론
심양 호텔 체크인이 새벽 12시 약간 넘긴 시간으로,
5시 50분 비행기를 타기 위 해 호텔 빠져 나온 것이 3시 40분.
3시간 남짓 머물렀으니 중국 여행 중 겨우 제대로 된 4-Star 호텔에
묵는 가 했었는 데 우리 와는 연이 없는 듯 하다.

귀국 비행기는 예정대로 출발하여 인천 도착 8-05일 오전 8시 20분 으로
우리 44회 백두산 팀은 여기서 해단 하였다.

끝으로 이 여행을 준비하는 데 물심을 아끼지 않은

김제구 산우회장, 김건환 총무,
그리고 그 무거운 카메라를 천지까지 울러 멘 허동녕 동기회장,
세밀히 보살펴 준 호정여행사 사장 43회 권문기 선배,
무엇 보다도 이 계획을 발의, 제창한 윤인중 전 산우회장 과
비록 동행은 못 하였지만 모든 세부사항을 챙기던 김영인 산행대장과
김성환 홈페이지 운영자 께
다른 이를 대신하여 감사 드리며

제한 된 예산안에 고급 기념품을 챙겨 준 김대송 동문과
그 외 이름을 일일이 적지 못하는 관계 된 모든 이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2001 년 8월 8일 산행을 마치면서
대변인 오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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